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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

나가레보시 2020. 9. 28.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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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이름은.(2016)

누구나 언젠가는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나갈 수도 있고,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재해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다. 영화 <너의 이름은>은 거대한 재해에 휘말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추모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다시 삶의 의지를 부여한다.


작화와 영상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배경 미술은 오타쿠가 아닌 일반인들도 감탄하면서 관람한다. 이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신카이 감독의 불문율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너의 이름은' 이전까지 신카이 감독의 인물 작화는 발로 그린 것 아니냐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처참했다. 상대적으로 배경과 인물의 차이가 적다고 평가받는 초속 5센티미터조차 이러한 비난은 여전했다.

이러한 비판은 '너의 이름은' 이후로 사그라들었다. 신카이 마코토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밑에서 작화 감독을 맡던 안도 마사시와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등의 영화에서 캐릭터 디자이너를 맡은 타나카 마사요시를 영입하여 대대적으로 작화를 손보았다.

노력은 결실을 맺어 신카이 마코토 특유의 고퀄리티 배경 작화와 안도 마사시, 타나카 마사요시의 분투로 향상된 인물 작화가 시너지를 내어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쌍벽을 이루는 건담의 창시자이자 평가에 촌철을 아끼지 않는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도 이 영화에는 비판할 것이 많지만 영상미로는 흠잡을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너의 이름은'의 영상미와 작화는 엄청나다.


닫혀버린 마을

여주인공 미츠하가 살고 있는 마을 이토모리는 산으로 외부와 단절되어 있는 마을이다. 마을은 누군가가 시집이나 장가도 오지 않고,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골이라고 미츠하는 말한다. 고령의 어른들만이 남아 마을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미츠하의 할머니는 미야미즈 신사의 신관이다. 할머니는 실매듭을 만들며 신과 이어지는 것을 미츠하와 요츠하에게 강조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먼 옛날에 '마유고로의 큰 불'이라고 불리는 화재로 자료들이 전부 불타버려 어째서 신과 이어져야 하는지, 신과 이어지기 위한 의식과 마을의 축제가 어째서 열리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미츠하와 요츠하에게 무녀의 역할을 지시할 뿐이다.

후반에 등장하는 축제와 의식의 비밀을 생각해보면, 어른들은 외부와 단절되어 자신들만의 잘못된 가치관을 갖고 마을을 지켜야 하는 사명은 잊어버린 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바뀌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뀌지 못했다. 바뀌고 싶어도 그들은 이미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기에, 의미도 알지 못하는 전통을 지키는 길 뿐만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재해를 딛고 살아가고 있다

2011년, 일본 열도에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실종되었다. 이로 인한 연쇄로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여 아직도 방사능이 흘러나오고 있다. 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재해가 일어난다. 이토모리 마을은 1000년 주기로 혜성이 낙하하는 지점이다. 이 운명은 반복되어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시기, 운석은 한 번 더 낙하하여 수많은 인명과 삶의 터전을 빼앗는다.

그러나 3년 뒤, 이토모리 마을의 비극은 사람들에게서 빠르게 잊혀 간다. 동일본 대지진도 그랬다. 일본인들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겼을 지진에 대한 기억은 영화가 개봉한 기준으로 5년이 지나 일본인들에게서 점점 잊혀 가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러한 일본인들의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대한 재난에 대한 트라우마를 겨냥했다. 비슷한 재난을 겪었던 일본인들은 이 영화에도 공감할 수 있었고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재해가 잊혀만 가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해외도 그리 다르지 않다. 바로 옆 나라 한국만 보아도 엄청난 재해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그 밖에도 전 세계의 나라들은 테러, 재난 등의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들도 국가적인 재난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기에 이 영화를 보며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재해의 기억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그 기억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너의 이름은。

영화 내에서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서로의 이름을 묻는다. 처음에는 몸에 낙서를 하고, 시간축이 엇갈린 탓에 알지도 못하는 여자의 이름을 묻기도 하고, 잊지 않기 위해서 이름을 묻는다. 이름이라는 것은 정말 중요한 존재다.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자 타인과의 관계에서 첫번째로 사용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 끝에는 반고리점(。)이 붙어 있다. 이는 서양식으로 작문법이 변경된 한국을 제외하고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된다. 마침표(. )처럼 생기기도 했지만 반고리점은 느낌표(!), 물음표(?), 마침표(. ) 전부로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貴方は何を飲みますか。(당신은 무엇을 마십니까)라는 문장은 '당신은 무엇을 마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무엇을 마십니까?'라는 의문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너의 이름은。이라는 제목도 그저 마침표가 찍혀 있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이름을 묻는 '너의 이름은?' 이라는 의문형이 될 수도 있고 상대방을 이름을 듣고 놀라며 '너의 이름은!' 이라는 감탄문이 될 수도 있으며 '너의 이름은.' 이라며 짧게 읊조리는 문장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의 이름을 묻고, 이름을 듣고 놀라면서 서로의 이름을 짧게 읊조리는 것. 이것이 타키와 미츠하가 시간을 넘어가면서까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기억들을 잊으면서 살아간다. 잊힌 기억은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어딘가에 박혀 있는 채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부르는 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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