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나와 앨리스

나가레보시 2021. 9. 1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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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와 앨리스(2004)

내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작품을 접한 것은 2015년 공개된 로토스코핑(실사 촬영 후에 프레임을 전부 따라 그려 만드는 기법)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 리뷰할 영화 <하나와 앨리스> 연작의 두 번째 작품이자 프리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두 작품을 바로 연달아 보지 않았다.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의 소녀 감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추억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런 감상을 이어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1년이 흐른 어느 날, 그저 심심해 <하나와 앨리스>를 감상하게 된 나는 그 생각을 후회하고 말았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 두 소녀의 추억과 우정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게 만드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우정
리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이 작품의 주요 키워드는 우정과 추억이고,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요소가 사랑이라는 것을 밝혀두도록 하겠다. 작품 속에서 우정과 추억 중 먼저 찾아오는 가치는 우정이다. 하나는 테츠코와 함께 등교하던 도중 한 선배에게 반해버리고, 선배를 미행하다 그가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해버린 것을 이용, 기억상실증이라 속이며 자신이 그의 여친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선배를 차지하게 된 하나는 기억상실증을 의심하는 선배를 속이기 위해 테츠코가 그의 전여친이었다고 한 번 더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사랑은 우정을 표현해내는 소재가 된다.

선배가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하나의 말을 믿은 테츠코는 선배를 만나보고 마음에 든 듯 그의 기억상실증을 고쳐주고자 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테츠코는 기억상실증이 거짓임을 알게 되고, 삼각관계는 심화된다. 테츠코는 하나의 앞에서 내가 게임에서 이기면 선배와 헤어지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이로 인해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다툼은 그리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친한 친구들끼리 별 것도 아닌 일로 다투고 곧바로 화해하는, 제삼자가 보면 바보처럼 보이기도 할 만큼 덧없는 다툼일 뿐이다. 그만큼 하나와 테츠코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하나와 테츠코는 서로 우리가 절교했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면서도 항상 함께하고, 함께 발레 교실에 다니는 다른 친구들도 그들이 절교했다는 말에 친구끼리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할 뿐 두 소녀의 절교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여러분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절친한 친구들과 다투어도 몇 시간 지나면 다시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함께 놀러 다니던 그 우정을. 영화에서 이러한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즉, 다투다가도 다시 잊어버리는 그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툼의 원인을 선배를 둘러싼 삼각관계라고 설정하여 두 소녀가 덧없이 다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함께하고, 최종적으로 테츠코가 홀로 하나의 만담극을 관람하며 떠드는 그런 우정을 표현해 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사랑의 이야기는 겉치레일 뿐, 하나와 앨리스의 바보 같은 다툼만큼이나 덧없다.

추억
영화의 두 키워드 중 우정이 하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면, 추억은 테츠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영화 3분의 1 지점쯤에 테츠코가 아버지를 따로 만나는 시퀀스가 나온다. 그녀의 부모님은 이혼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눈다. 테츠코가 어렸을 적 가족끼리 바닷가에 놀러 가 카드 게임을 하다 카드가 날아가 버린 일, 중국어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 같은 사소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추억이라는 키워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특히 중국어가 가장 중요하다. 테츠코는 아버지와 헤어지며 "워 아이 니(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고, 아버지는 "짜이 찌엔(또 만나요)"이라며 정정한다. 부녀의 돈독함을 표현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테츠코에게는 가족이 하나였던 어린 시절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짜이 찌엔"은 매일 아버지를 만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이상적인 가족이 아닌, 항상 떨어져 있다 가끔씩 만나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힌 가족을 상징하는 말이다.

그런 테츠코는 선배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시점에서 선배의 모습에 아버지와 추억을 겹쳐본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와 선배를 데리고 놀러 간 곳은 옛날에 가족들과 함께 갔던 바닷가 장면에서다. 그곳에서 테츠코는 하나와 선배에게 아버지와 했던 카드 게임을 재현하고, 바닷바람에 카드가 날아가버린 일도 재현된다. 사랑을 통해 그녀의 추억이 재현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억을 재현하는 사랑도 끝이 난다. 선배가 기억상실증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우습게도 선배가 이를 알아챈 계기는 테츠코가 하나에게 선배와 결별하라는 드립을 치기 위해 제안한 하트 카드 빨리 찾기 대결에서 선배가 하트 카드를 찾았음에도 테츠코가 드립을 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츠코는 확실히 하트 카드를 찾았고, 선배도 하트 카드를 찾은 이유는 테츠코가 어린 시절 가족들과 바닷가에서 카드 게임을 하다 카드가 바닷바람에 날아가 버려 잃어버린 카드였기 때문이다. 추억을 재현할 뿐이었던 사랑이 실제의 추억을 직접 눈앞에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테츠코는 선배에게 속인 것을 사과하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워 아이 니.", 그리고 "짜이 찌엔." 선배는 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선배가 이를 알아들을 필요는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사랑은 그저 아름다웠던 추억을 재현하고, 끝내 테츠코의 눈앞에 나타나게 만들어주는 매개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테츠코는 추억의 하트 카드를 선배에게 넘기고, 서랍 속에 간직하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도, 선배와의 사랑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며 성장한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길거리 캐스팅으로 기획사에 스카우트되어 오디션을 보러 다니지만 번번이 낙방했던 그녀는, 보란 듯이 가장 자신 있는 발레로 오디션장의 모두를 사로잡아 합격한다.

우정과 추억
지금까지 우정과 추억은 하나와 테츠코 두 사람에게 각각 할당되어 왔다. 그러나 테츠코의 합격 이후 두 키워드는 하나로 합쳐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와 테츠코는 함께 테츠코의 사진이 나온 잡지를 읽으면서 장난을 친다. 이 장면이야말로 두 소녀의 우정을 아름답게 나타내는 장면이자 이 우정도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그립고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의 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 암시하는 장면일 것이다. 영화 <하나와 앨리스>는 사랑이라는 존재에게 이렇게 청하는 작품이다. "사랑이여, 어째서 추억과 우정으로 오시어 훼방을 놓으려 하시나요? 사진으로 찍어 남겨드릴 테니, 서랍 속 하트 카드로 기억해드릴 테니 잠시 뒤로 물러나 주시어 지금 이 순간의 우정과 추억을 즐기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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