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

나가레보시 2022. 11. 2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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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펑크: 엣지러너(2022)

(영상 시청 가능 https://youtu.be/OqjGOTImJwg)
나는 사이버펑크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유의 삭막하고 광기 어린 세계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본 사이버펑크 장르 애니메이션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 이외에는 없을 정도다. 물론 <공각기동대>는 좋은 작품임이 틀림없지만. 그런 내게 이마이시 히로유키가 감독하고 트리거가 제작한 WEB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큰 놀라움을 주었다. 삭막하고 광기 어린 세계임에도 불구하고 태양과도 같은 사랑의 열기가 너무나 뜨거워서, 끝내 빙긋 미소 짓게 만들어버리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제목의 가치를 제대로 증명해내는 작품일 것이다. 사이버펑크라는 제목은 나이트 시티라는 무대를, 엣지러너라는 부제목은 그 가장자리에 있는 광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
남주인공 데이비드 마르티네즈는 언제나 기대에 의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어머니 글로리아는 데이비드가 아라사카에 입사하여 최고가 되기를 기대했고, 아버지와 같았던 동료 메인은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데이비드에게 끝까지 달려 나가라는 기대의 유언을 남긴다. 이처럼 데이비드는 정신적으로 크게 의지했던 인물들이 떠나가면서 자신에게 남긴 기대를 마음속 깊은 곳에 새긴다. 그러나 데이비드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기대에 의존하게 된다. 글로리아와 메인이 데이비드에게 남긴 기대는 모두 최고가 되라는 것이었다. 데이비드는 이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이버펑크로 거듭나고, 리더로 거듭난다. 그러나 기대만을 삶의 의지로 삼는 것은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데이비드는 삶에 있어 기대만을 우선한 나머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하고 만다.

이러한 위기는 데이비드가 본격적으로 사이버 사이코로 변해가는 최후반부에서 더욱 심각하게 묘사된다. 데이비드는 밀리테크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나 아라사카에 납치된 루시를 구하기 위해 사이버 스켈레톤을 장착해 싸우게 된다. 그러나 사이버 스켈레톤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사이버 사이코화의 위협이 데이비드를 덮치고, 그 과정에서 정신이 나가버린 데이비드는 어머니 글로리아와의 마지막 순간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수준으로 미쳐버리고 만다. 이 장면의 포인트는 데이비드가 미쳐서 회상하는 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이다. 글로리아가 죽기 전 데이비드에게 보낸 것은 그가 아라사카에 입사하여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기대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데이비드가 미쳐버리고 마는 그 순간까지 주변의 기대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살아온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랑
이러한 데이비드를 기대로부터 해방시켜주는 관념은 바로 사랑이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여주인공 루시 쿠시나다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루시는 언제나 타인과 벽을 쌓고 지내온 인물이었다. 그런 루시는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산데비스탄을 시험하던 데이비드와 만나게 되고,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 함께 행동하며 자신의 꿈이었던 달로의 이주를 고백한다. 그날을 기점으로 루시와 데이비드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끝내 사랑을 나눈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루시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 된다. 그렇기에 루시는 위기에 처한 메인을 구하러 가려는 데이비드에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었고, 데이비드를 지키기 위해 아라사카의 자객을 막는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시는 데이비드를 사랑하기에 흔들리는 관계 속에서도 해야 한다고 믿는 일을 한다.

데이비드 역시 루시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이버 스켈레톤을 장착하고 루시를 구하러 가는 과정에서 그런 사랑의 의미는 조금씩 퇴색되는 듯 보인다. 그동안 사이버 사이코로 변해가는 데이비드에게 남아 있는 것은 과도한 기대가 만들어낸 알 수 없는 꿈들 뿐이다. 그런 데이비드에게 사랑의 의미를 되살려주는 인물이 바로 루시다. 마지막 싸움에서 사이버 사이코화로 인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이비드에게 루시는 입을 맞춘다. 그렇게 데이비드는 깨어나고, 루시는 고백한다. '네가 죽기 않기를 바랐어.' 이에 데이비드는 확고히 깨달으며 고백한다. '널 지켜주고 싶었고, 네가 꿈을 이루기를 바랐어. 그게 나의 꿈이야.' 그렇게 데이비드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꿈을 고백하게 된다. 기대로 얼룩진, 진정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꿈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꿈을 그는 갖게 된 것이다.

데이비드는 꿈을 이룬다. 루시는 달로 여행을 떠난다. 뜨거운 태양열이 내리쬐는 월면에서 루시는 데이비드를 회상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는다. 데이비드가 죽지 않기를 바랐던 이유는 늘 꿈꾸었던 달이 곧 데이비드 그 자체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My Moon, My Man'이라는 최종화의 제목 역시 그런 루시의 심정을 대변해준다. 데이비드는 모두를 사랑했기 때문에 기대에서 도망칠 수 없었고, 지옥 같은 감옥 속에서도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루시는 데이비드를 사랑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사랑했기 때문에 꿈같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좋았다. 하지만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서로의 꿈들은 이루어져 있었다. 단지 영원히, 함께 이루어져 있기를 바랐을 뿐이다. 하지만 사이버펑크의 세계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은, 영원히 아름답게 남는다.

총평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나는 사이버펑크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영화 <공각기동대>와 함께 그런 나의 취향을 깨부순 뛰어난 사이버펑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선호하지 않는 장르의 작품임에도 나의 마음을 설레게 만드는 작품과 마주해보니, 어떤 작품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거대 로봇 장르를 싫어하는 나를 사랑의 이야기로 미쳐버리게 만들었던 작품인 <SSSS.DYNAZENON>이 바로 그것이다. 공교롭게도 <SSSS.DYNZENON> 역시 트리거의 작품이다. 이쯤에서 트리거에 대한 한줄평을 해보자면, '어떤 소재를 끌어오더라도 끝내 반하게 만드는 제작사'라고 평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2010년대까지는 교토 애니메이션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20년대는 트리거의 시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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