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도 시청 가능 https://youtu.be/p3wftO2evEM)
나는 배우 출신 감독들에게 묘한 기대를 갖고 있다. 내가 야마다 나오코 다음으로 좋아하는 감독이 배우 출신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확실할 것이다. 이처럼 배우 출신으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뿐만이 아니다. 일본에는 키타노 타케시(코미디언이기는 하지만, 배우로도 활동하였다) 같은 감독이 있고, 한국에도 <사라진 시간>을 감독한 정진영, <미성년>을 감독한 김윤석 같이 좋은 영화를 만든 배우 출신 감독들이 있다. 그만큼 배우 출신 감독들에게는 처음부터 감독으로 데뷔한 사람들과는 다른 묘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는 그 기대를 한 번 더 충족시켜 준 작품이다. 감독 데뷔작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앞서 이야기한 정진영, 김윤석 감독의 영화들보다도 뛰어나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 <헌트>는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자, 생각해보자. 1983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故 이웅평 대령이 미그기를 몰고 대한민국으로 귀순하였고, 북한이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을 암살하기 위해 미얀마의 국부 아웅 산의 묘소에서 폭탄 테러를 저질렀다. <헌트>는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웅평 대령은 안기부에 숨어든 간첩을 붙잡을 암호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는 두 주인공이 결국 엇갈리게 되는 계기를 제공한다. <헌트>는 이처럼 굴곡진 1980년대의 사건들이 응용된 밀도 있는 각본이 인상 깊은 영화다. 1983년이 아니라 1980년대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 영화에서 주가 되는 사건은 1983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가는 사건은 1980년에 일어난 5.18 민주화 운동이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작품의 장르적 재미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영화 <헌트>는 첩보 액션 장르를 표방하고 있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야기적인 면에서도 재미있어야 하지만 장르적인 면에서도 재미있어야 한다. 이정재 감독은 이러한 장르적 요구를 잘 이해하여 영화 속에 반영하였다. <헌트>는 첩보전으로서도, 총기 액션으로서도 합격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장르적 쾌감을 안겨준다. 첩보전을 살펴보자면, 1980년대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이 교차되면서 이루어지는 첩보전의 과정은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특히 끝내 정체가 탄로나고 평화 통일이라는 최후의 보루마저 사라질 위기에 처한 동림과 반역자 전두환을 처단한다는 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안기부 차장이 손을 잡았다가 결국 엇갈리게 되는 과정까지 첩보전으로 표현해냈다는 것이 무척 인상 깊었다.
이 엇갈림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장면은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의미로 ‘애국가 정지!’를 외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동림과 김 차장의 처지를 생각해본다면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동림이 알고 있던 북한의 계획은 전두환을 암살한 후 협상을 통해 대한민국과 북한이 통일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계획은 전두환 암살한 후 적화통일을 실행하는 방안으로 변경된다. 이에 동림은 초조해진다. 김 차장에게는 앞서 이야기한 5.18 민주화 운동이 개입된다. 그는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다가 충격을 받게 되고, 이는 전두환을 처단하고자 하는 계기가 된다. 이제 ‘애국가 정지!’ 장면을 다시 살펴보자. 북한은 애국가 연주가 끝나면 작전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김 차장은 이 계획을 이용해 전두환을 처단하려 한다. 그래서 전두환이 탄 차량이 아닌데도 애국가가 울리자 ‘애국가 정지!’를 외친다.
그러나 동림은 아웅 산 묘소에까지 북한 간첩이 숨어있을 만큼 북한 측의 계획이 진행된 것을 알게 되자 전두환이 탄 차량이 오고 있음에도 ‘애국가 정지!’를 외친다. 전두환이 암살되면 북한은 적화통일을 위해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엇갈린다. 이보다도 더 인상에 남는 것은, 끝까지 엇갈리기만 했던 두 사람 모두 계획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에서는 같다는 것이다. 김 차장은 전두환 처단 실패 후 북한의 폭탄 테러에 휘말려서, 동림은 딸처럼 여겼던 유정과 그 동료들에 의해서 죽음을 맞는다. 특히 동림의 죽음은 더욱 인상적인데, 죽은 동림의 정보원과 그의 딸이라고 생각했던 유정 모두 사실 북한에서 보낸 감시자였다는 복선이 작품 전반에 촘촘하게 깔려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전부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영화의 첩보전과 드라마를 구성하는 각본 및 이를 화면 속에 구성하는 연출은 뛰어나다. 이것이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다. 이제 총격 액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사실 나는 <헌트>의 총격 액션을 그리 기대하지 않았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 쓸데없이 총격전만 계속 등장한다는 혹평을 읽어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영화를 보고 나서 단숨에 깨어졌다. <헌트>의 총격전은 합격점을 줄만하다. 초반의 미국 총격전은 살짝 어지러운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박진감 넘치는 시퀀스였고, 김 차장이 동림을 잡기 위해 쳐들어갔다가 북한 간첩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김 차장과 동림이 손을 잡게 되는 계기를 만드는 연출로도 사용되어 정말 인상 깊게 본 장면들 중 하나다. 이러한 총격전 역시 각본과 연출이 만들어낸 시너지 효과다.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 <헌트>는 비슷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지속적으로 대립하다 끝내 엇갈리지만, 결국에는 같은 최후를 맞는 두 인물의 구도를 굴곡진 1980년대의 사건들을 응용하여 멋지게 풀어내는 과정이 인상적인 영화다. 연출의 경우 이정재 감독이 과거 출연했던 영화들의 감독들에게서 모티브를 따온 듯한 정석적인 구도의 연출들이 작품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끝내 본인만의 무게감 있는 연출로 변신하여 극을 이끈다. 각본은 이 영화의 메인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인상적이다. 첩보전과 드라마를 짜임새 있게 풀어간 것은 물론,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1980년대의 여러 사건들을 조합했음에도 그다지 치우치지 않는다. 이 영화는 그저 잘못된 시대와 잘못된 단체, 그리고 잘못된 개인을 그려낼 뿐이다. <헌트>, 올해 여름 한국 영화 대작들 중 최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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