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헤어질 결심

나가레보시 2022. 7. 7. 00:29
728x90

헤어질 결심(2022)

(영상으로 시청 가능 https://youtu.be/fEyJJkCqtR4)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5대 영화감독으로 봉박김이홍을 꼽는다. 봉준호, 박찬욱, 김기덕, 이창동, 홍상수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오늘 리뷰할 영화는 이 다섯 명의 감독들 중 박찬욱 감독의 신작인 <헤어질 결심>이다. 사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올드보이>를 보았을 때도,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이자 박찬욱 감독의 바로 전작인 <아가씨>를 보았을 때도 별로인 지점들이 존재했다. 내가 유일하게 극찬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그의 초창기 영화 중 하나인 <공동경비구역 JSA> 한 편뿐이다. 하지만 영화 <헤어질 결심>은 정말 좋았다. 박찬욱 감독의 개성이 그대로 살아있으면서도 전작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주인공의 대사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헤어질 결심>은 지금도 내 마음에 잉크처럼 스며들고 있다.

 

산: 파도처럼 밀려오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1부는 서래에게 반한 해준의 모습에서 시작되고 끝내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는 해준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해준은 구소산 사망 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서에 출두한 서래의 모습에 끌리게 된다. 이후 취조가 시작되며 해준은 거리낌 없이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는 서래의 모습과 가정폭력의 흔적을 거리낌 없이 남자 앞에서 보여주는 서래의 모습을 보며 그녀에게 조금씩 호감을 갖게 된다. 이후의 해준의 행적은 정말 웃기다. 취조실에서 서래에게 비싼 초밥 세트를 사주기도 하고, 쉬는 시간 동안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까지 전부 알려준다. 그 외에도 서래의 집 앞에서 잠복하며 망원경으로 그녀를 감시하기도 하는데, 감시는 커녕 아이스크림을 끼니를 때우고 드라마를 보다가 잠드는 서래의 모습을 보고 동정을 느낌과 동시에 그녀를 점점 사랑해가기 시작한다.

 

이 잠복 감시의 연출은 마치 데이트처럼 이루어진다. 현실의 해준은 멀리서 망원경으로 서래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해준의 머릿속에서 그는 이미 서래의 집 안까지 들어와 바로 곁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듯한 모습으로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웃기게 말해보자면 망상 데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그때부터 이미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고 있었다. 마치 강렬하게 밀려오는 파도처럼. 서래 역시 해준이 취조 중에 자신을 친절히 대해주는 모습, 자신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모습, 홍산오 사건의 유력 용의자를 멋지게 체포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그에게 조금씩 호감을 갖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해준은 서래가 죽은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며, 서래를 향한 동정심과 사랑은 더욱 커져만 간다. 서래 역시 자신을 지켜보다 잠든 해준의 사진을 찍으며 더욱 호감을 표시한다.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해준은 항상 아이스크림으로 끼니를 때우는 서래에게 중국식 볶음밥을 만들어주며 자신의 미결 사건 사진이 붙어있는 칠판을 구경시켜주고, 서래는 해준과 함께 홍산오를 체포하는 데에 실마리를 찾아준다. 덕분에 해준은 홍산오를 궁지로 몰아넣으며 그를 체포하기 직전까지 간다. 이 체포 직전의 장면이 중요하다. 이 장면은 해준이 서래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부 털어놓는 장면임과 동시에, 해준과 서래의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암시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홍산오는 투옥을 죽기보다 싫어했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범죄를 저질렀다. 이에 해준은 공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도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가 가정폭력까지 당했기에. 홍산오는 끝내 목숨을 끊는다. 해준은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서래와 해준의 미래다.

 

이후 알리바이의 성립으로 서래가 풀려나면서, 지금까지 경찰과 용의자의 신분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있던 두 사람의 사랑은 빠르게 진척되어 가기 시작한다. 해준과 서래는 데이트로 절을 구경하며 북을 친다. 이 북은 중요하다. 해준이 먼저 두드리고, 그다음엔 서래가 두드리고, 마지막으로 해준이 다시 두드린다. 이는 두 사람이 사랑을 하는 순서다. 해준이 먼저 사랑하고, 서래가 그다음으로 사랑하고, 해준이 다시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영화의 엔딩과도 연관이 있다. 관계를 지속하는 동안 해준은 많은 사실을 알게 된다. 서래가 할머니의 부탁으로 펜타닐 알약을 먹여 할머니를 죽였다는 것, 어머니의 말씀대로 독립운동가인 외조부의 소유였던 호미산을 찾아 한국에 왔다는 것, 그러나 산을 찾기 위한 재판에 져서 입국 관리자 기도수로부터 가정폭력을 당하며 결혼생활을 지속해왔다는 것까지.

 

서래는 자살한 홍산오 때문에 괴로워하며 잠들지 못하는 해준을 재워주고, 절에서는 사건 당시 녹음한 파일을 삭제, 해준의 집에서는 미결 사건들의 사진을 칠판에서 떼내어 불태우는 것으로 해준에게는 여전히 미결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홍산오 사건을 완전히 종결시켜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은 진전된다. 그 사이에 주말부부였던 해준과 정안의 관계를 지속하게 해 주었던 육체적 사랑, 에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육체적으로 떨어져 있었기에 더욱 육체적인 사랑으로 부부의 관계를 증명할 필요가 있었지만,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그들의 사랑에는 정신적인 플라토닉 러브로 충분. 하지만 그런 관계에도 조금씩 종결의 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서래 대신에 간병을 간 해준이 그녀의 알리바이를 무력화할 증거를 찾게 된 것이다.

 

할머니를 간병하던 해준은 할머니의 휴대폰에 설치되어 있던 계단 오르기 앱에 할머니가 138층을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해준은 이에 의문을 갖는데, 나이 드신 할머니가 138층을 오른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해준은 치매 초기 증세를 보이던 할머니가 월요일에 서래가 오는 것이 아닌, 서래가 오는 날이 월요일이라고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해준은 다시 서래를 의심하고, 알리바이를 무력화할 계획을 세운다. 이후 해준이 직접 암벽까지 등반하며 알아낸 사실은 이렇다. 서래는 간병하던 할머니께 자신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기종의 휴대폰을 사드렸고, 몰래 자신의 휴대폰과 할머니의 휴대폰을 바꾸어 산에 오른 후 간병업체의 전화를 받아 알리바이를 구축했다. 이후 초보자용 암벽 등반 코스의 리뷰 영상을 찍고 있던 기도수의 루트를 따라갔다.

 

기도수를 따라 정상에 오른 서래는 곧바로 기도수를 밀어 살해했고, 이때 기도수는 떨어지면서 서래의 손을 긁었다. 이로 인해 해준과 경찰들이 기도수의 손톱에서 서래의 DNA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추적 시퀀스의 연출은 정말 대단했다. 추적은 서래의 시점과 해준의 시점이 교차되어 이루어지는데, 서래의 시점인 상상과 해준의 시점인 현실의 사이를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다음 교차시키는 듯하면서도 끝내 사실이 아니라는 양 모호하게 연출되면서 생각의 여지를 넓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모든 추적을 마친 해준은  단 오르기 앱에 138층을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며 절망한다. 사랑에 미쳐 범인을 놓쳤고, 모든 수사자료는 폐기한 이후였기 때문이다. 꼿꼿하게 형사로서 책임을 다하던 해준에게, 서래의 꼿꼿함에 반해 그녀의 편의를 봐준 해준에게 이는 재앙이었다.

 

해준은 곧바로 서래의 집으로 향해 그녀를 추궁한다. 그러자 더욱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다. 기도수에게 온 협박 편지는 그의 부패를 알고 있던 서래가 보낸 것이었고, 기도수가 자살했다는 증거였던 유서 역시 서래가 조작한 것이었으며, 서래의 집에서 취해 행패를 부렸던 수완 역시 그저 서래의 집에서 잠들었을 뿐, 해준이 본 것은 서래가 수완이 행패를 부린 것처럼 위장해 둔 거실이었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서 그를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게 된 해준은, 동정심과 사랑, 그리고 경찰로서의 자부심이라는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진 해준은 서래에게 말한다. 자신의 마음은 붕괴되었다고. 그리고 마지막 증거물인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 아무도 찾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남기며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서래는 붕괴의 의미를 검색한다.

 

바다: 잉크처럼 스며들다

서래로 인해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을 앓게 된 해준은 아내가 있는 이포로 전근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새로운 남편 임호신과 함께 이포로 이사 온 서래와 마주치게 된다. 며칠 후, 해준은 아내 정안으로부터 살인사건이 일어났음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피해자는 놀랍게도 서래의 새 남편 임호신이었다. 이에 해준은 분노하며 서래에게 일갈한다.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그러자 서래는 답한다.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해준은 이번에야말로 서래를 잡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증거물을 수집하고, 피 공포증이 있는 해준을 위해 핏물로 가득한 풀장의 물을 빼고 피를 닦았다는 서래의 진술도 듣는다. 이 취조는 씁쓸하지만 웃기기도 하다. 해준은 1부의 취조에서 고급 초밥을 서래에게 대접했던 것과 달리 그저 핫도그 하나를 내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해준이 얼마나 서래에게 분노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임호신을 죽인 범인은 그에게 사기를 당했던 사철성이었다. 사철성의 어머니는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고 쓰러져 입원했고, 사철성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임호신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지만, 해준은 의심을 거두지 않고 서래와 사철성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한다. 이후 해준은 서래가 바다에 버린 휴대폰을 복구한다. 그렇게 알아낸 사실은 놀랍다. 임호신은 서래가 해준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녹음해 들으며 그를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서래를 협박해 사기에 이용한다. 이에 서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펜타닐로 사철성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사철성과 임호신이 마주치도록 하여 간접적으로 임호신을 살해했다. 사실을 알게 된 해준은 서래에게 전화를 걸지만, 서래는 중국어로 이렇게 말한 뒤 전화를 끊는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됐어요.'

 

그제야 해준은 자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다는 서래의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이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부산에서 자신이 서래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해준은 곧바로 서래를 쫓아간다. 한편, 서래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파고 들어가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해준이 자신에게 했던 사랑 고백,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저 바다 깊숙한 곳에 버리라는 사랑 고백처럼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그렇게 서래는 실종된다. 해준은 한발 늦게 바닷가에 도착해 서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하지만 서래는 없다. 그렇게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한 미결 사건으로 남는다. 해준은 영원히 서래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제 해준의 마음은 무너지고 깨어지기 전으로 돌아가, 미결 사건으로 남은 서래만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혹은 저주처럼.

 

대립적이지만 공통적

이 영화의 구도가 대립적이라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배경적으로 보면 1부의 산과 2부의 바다가 대립하고, 이야기적으로 보면 1부에서는 해준이 서래에게 반하고 2부에서는 서래가 해준에게 반하는 대립적인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존재한다. 해준과 서래는 시체를 보는 것에 거리낌이 없고, 바다를 좋아하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배우자는 자신의 남편과 아내를 끝없이 구속하려고 든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공통점들은 해준과 서래가 서로에게 빠지게 되는 원인이고, 산과 바다라는 대립적인 구도는 두 사람이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되는 원인이다. 우선 첫 번째, 시체를 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것은 해준과 서래 모두 꼿꼿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꼿꼿한 해준은 꼿꼿한 서래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렸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은 두 사람의 성격이 유사하다는, 즉 해준과 서래가 마음적으로도 잘 맞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작중에서 서래는 해준에게 번역기를 이용해서 이런 말을 한다. '공자님이 이르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여기서 물은 바다를 의미한다. 따라서 해준과 서래는 잘 맞는 커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해준과 서래를 구속하는 배우자들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해준의 아내 정안은 해준에게 주마다 맺어야 하는 성관계 횟수, 금연 등의 구속을 가한다. 또한 끊임없이 해준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의심한다. 서래의 남편이었던 기도수는 서래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다음 남편인 임호신 역시 서래와 해준의 관계를 이용하여 끊임없이 서래를 협박하고 이용한다. 이러한 배우자의 구속으로 인해 해준과 서래의 관계는 가까워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물리적으로, 파탄을 맞기 시작한다. 1부의 파탄과 2부의 파탄(이걸 파탄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은 모두 산에 의해 벌어진다. 바다를 좋아하는 인물인 해준과 서래의 물리적 파탄이 산에 의해 벌어졌다는 것이 대립적 구도로 보았을 때 중요하다는 것은 다들 이해하셨을 것이다. 1부의 파탄은 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의해 벌어진다. 서래가 범인이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해준의 마음이 붕괴되면서,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부산을 떠나 이포로 전근한다. 그렇게 해준과 서래는 물리적으로 헤어진다. 2부의 파탄 역시 산에서의 대화로 인해 벌어진다. 서래는 자신이 되찾지 못한 호미산에 올라 해준에게 선친들의 유골을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모든 짐을 내려놓은 서래는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결국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 영영 헤어진다.

 

미결

그러나 서래는 해준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게 된다. 서래는 산에서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했지만, 해준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실만큼은 마음속에 간직한 채 모든 진상을 알아낸 해준에게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며 중국어로 말한다. 이는 1부에서 서래가 해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해준을 이용하려는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그렇다면 서래는 어떻게 해준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일까? 서래는 임호신이 서래 씨를 협박하는 데에 사용한 녹음이 무엇이냐고 묻는 해준에게 '당신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했던 녹음'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해준은 서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해준은 서래의 휴대폰을 찾는다. 그 안에는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바닷속 깊이 던지라고 말하는 해준의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이후 해준은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바닷속 깊이 던지라'는 말이 곧 사랑의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해준은 경찰이라는 직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늘 꼿꼿하게 경찰로서의 의무를 지켜왔다. 하지만 서래를 사랑하게 되면서 이 의무는 붕괴, 즉 무너지고 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로 서래에게 한 말이 바로 그것이었다. 서래에게 이는 고백처럼 들려왔다. 자신의 자부심까지 망가뜨리면서 좋아하는 여자를 도와줬고, 모든 진상이 드러나고 그 여자와 헤어질 결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편의를 봐주는 남자에게 서래는 드디어 반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서래는 해준에게 말했다.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라고. 이후 서래는 이포로 향한다.

 

사기꾼 남편 임호신은 해준을 향한 서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이를 이용해 서래를 협박한다. 그러자 서래는 사랑하는 해준을 지키기 위해 간접적으로 임호신을 죽인다. 그리고 산에 올라 유골을 뿌린 후 해준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서래가 해준과 헤어지는 방식은 사랑의 고백과 똑같다. 바다 깊숙한 곳에 아무도 찾지 못하도록 휴대폰을 던지라고 말했던 해준의 말처럼, 서래는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파고 들어가 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해준의 사랑 고백에 답하며 실종된다. 해준은 서래의 옆에서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른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서래는 해준에게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된다. 해준에게 미결은 곧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 것이다. 해준은 자신의 미결 사건들에 대한 자료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절대 칠판에서 떼내지 않는, 경찰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해준과 서래 두 사람은 물리적으로는 헤어져버렸지만, 서로에 대한 마음만큼은 영원히 간직하게 되었다. 서래는 해준과 이어질 수 없었다. 자신과 해준이 만나는 것은 경찰과 용의자라는 이어질 수 없는 신분일 때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래는 해준을 사랑했음에도 그와 물리적으로 헤어질 결심을 했고, 그 대신 영원히 미결 사건으로 남겠다는 마음만을 간직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계획은 성공적일 것이다. 영화의 엔딩에서 해준은 바로 밑에 묻힌 서래를 찾지 못하고 그녀의 이름을 죽어라 부른다. 부하에게 연락해 수배령도 내린다. 하지만 서래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고, 서래의 실종은 미결 사건이 되어 영원히 해준의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이 영화의 엔딩은 어떻게 보면 로맨틱하기도 하다. 해준과 서래가 좋아하는 바다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남는 엔딩이 되기에...

 

홍산오 사건

앞서 나는 홍산오 사건이 해준과 서래의 미래라고 말했다. 어째서일까? 자, 홍산오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이유를 다시 복기해보자. 홍산오에게는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말았다(좋아하는 여자와 이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홍산오는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를 2부의 서래에게 적용하면, 똑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서래는 해준을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해준에게는 아내가 있고, 용의자와 경찰이라는 신분 외에는 만날 방법도 없다. 그래서 또다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해준을 만난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즉, 홍산오의 죽음과 그 계기는 후에 일어날 서래의 죽음과 그 계기를 미리 예언하는 셈이다. 극에 있어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홍산오 사건이 1부에서 계속 언급되고 등장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눈은 중요하다. 해준은 대부분의 시신들은 눈을 뜨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해준은 시신의 모습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 눈에 안약을 넣는다. 안약을 넣으면 잠깐은 시야가 흐려지지만, 이윽고 맑아지게 된다. 즉, 안약은 꼿꼿함을 강조하는 해준이 자신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하지만 그런 해준의 시야를 계속 흐리게 만드는 존재가 그의 앞에 나타난다. 바로 서래다. 서래는 안약 같은 인물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해준은 서래를 보고 있을 때는 눈이 맑아진다. 다만, 그녀를 보고 있을 때만 그렇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으로 용의선상에서 빠져나왔다. 이는 곧 해준의 시야가 서래를 제외하면 흐려져버렸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해준은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만, 서래가 해준의 미결 사건으로 남으면서 해준의 시야는 결국 영원히 흐려졌다.

 

파도처럼 밀려오고, 잉크처럼 스며들다

해준과 서래가 사랑을 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해준의 사랑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과 같다. 해준은 서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래서 경찰이라는 자신의 신분도 잊고 서래의 편의를 봐주고, 서래가 풀려난 뒤에는 더 노골적으로 데이트를 한다. 해준은 파도처럼 강렬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래의 사랑은 마치 잉크가 스며드는 것과 같다. 처음에 서래는 해준에게 호감이 있는 것처럼 묘사된다. 실제로도 호감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 그 호감을 자신을 위해 이용할 뿐이었다. 하지만 해준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듣고 그의 진심을 알게 되자 서래는 그제서야 사랑을 하게 된다. 잉크가 조금씩 스며들며 얼룩을 키워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해준과 서래가 사랑을 하는 방식의 차이는 영화를 그 엄청난 엔딩까지 이끌어 나가는 중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전자기기

<헤어질 결심>에서 가장 돋보였던 소품이라면 단연 전자기기일 것이다. 전반적으로 iPhone, iPad, Apple Watch 같은 Apple의 제품들이 등장한다. 작품 바깥에서 보면 이는 박찬욱 감독의 개인 취향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iPhone을 활용하여 여러 단편 영화를 촬영한 적도 있다. 작품 안에서 보면 전자기기들은 매우 중요해진다. 해준은 자신의 사건 기록을 Apple Watch에 녹음했고, 서래는 해준의 목소리를 자신의 iPhone에 녹음했으며, 해준이 서래의 알리바이를 무력화시킨 증거인 계단 오르기 앱도 서래가 간병하는 할머니의 iPhone에 설치되어 있던 것이다. 감정적인 연출에 있어서는 iPhone의 기능인 iMessage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헤어질 결심>은 전자기기를 잘 활용하는 영화이다. 전자기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꽤 흥미로웠다.

 

촬영과 편집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여럿 보았다. <공동경비구역 JSA>, <올드보이>, <아가씨> 등.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았지만 '솔직히 박찬욱 감독 영화의 편집이 그렇게 뛰어난가?' 하는 생각은 있었다. 물론 박찬욱 감독 영화의 촬영은 매우 수준급이다. 지금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정정훈 촬영감독의 실력은 <올드보이>의 장도리 롱테이크 액션씬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집은 촬영에 비하면 그다지 와닿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헤어질 결심>은 달랐다. 영화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아도 이 영화의 편집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바로 들 것이다. 훌륭한 화면 전환과 이를 뒷받침하는 김지용 촬영감독의 영상은 멋진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특히 1부는 촬영과 편집에 말 그대로 홀려버릴 정도였다. 지난 2년 동안 편집에 정말 엄청난 공을 들였을 것이란 생각이 물씬 들 정도다.

 

총평

나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올드보이>는 흥미진진했지만 흥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지는 못했고, <아가씨>는 1부는 웃겼고 2부는 대단했지만 3부와 엔딩은 정말 별로였다. 그나마 <공동경비구역 JSA>는 정말 대단했다. 감상하는 동안 어떤 제약 없이 다리를 건너갈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랐다. 박찬욱 감독은 반신반의한 감독이다. 분명 영화를 잘 만드는 것 같다가도, 결국 별로인 지점을 드러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이를 드디어 깨부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단한 영화였다. 수려한 촬영도, 매혹적인 편집도, 소름 끼치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도 전부 마음에 들었다.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잉크처럼 내 마음속에 계속 스며든다면, 언젠가는 최고작이 될지도 모른다.

728x90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헌트  (0) 2022.08.22
탑건: 매버릭  (0) 2022.07.14
신카이 마코토의 영화  (0) 2022.06.20
브로커  (0) 2022.06.18
우연과 상상  (0) 2022.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