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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

나가레보시 2022. 6. 18.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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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커(2022)

(영상으로 시청 가능 https://youtu.be/Ikb5K-A69iQ)

일본 영화하면 떠오르는 감독은 누구일까? 키타노 타케시, 하마구치 류스케, 구로사와 기요시... 많은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시네필을 넘어 대중들에게도 크게 알려져 있는 일본의 영화 감독은 단연 고레에다 히로카즈일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아무도 모른다>로 야기라 유야에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본인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고레에다 감독은 <어느 가족> 이후로 일본을 떠나 국제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2019년에는 프랑스의  제작사와 협업한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였고, 올해 2022년에는 한국의 제작사와 협업한 영화 <브로커>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배우 송강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일본을 떠난 이후에 만든 영화인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을 본 적이 없다(언젠가는 볼 예정이다). 그래서 더욱 <브로커>에 흥미가 생겼다. 과연 일본인이 바라보는 외국, 그것도 일본의 바로 옆 나라인 한국이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나는 <브로커>가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극장을 찾았다. 영화 자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다만 지금까지 만들어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는 결이 다른 영화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게 말하면 고레에다 감독이 일본에서 만든 지금까지의 영화들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영화가 나왔다. 분명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박한 평을 내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감독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의 정서적 차이 역시 영화의 문제에 영향을 미쳐버렸기 때문이다.

 

탄생의 가치와 가족, 그리고 모성애

<브로커>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일 것이다. 우선 작중에 등장하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가 이를 증명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러한 주제를 영화로 표현하기 위해 일반적인 가족을 이루지 못한 인물들이 하나의 목적을 갖고 행동하면서 가족이 되어가는 이야기를 그려냈다. 그 이야기는 나쁘지 않았다. 브로커 일당은 함께 행동하면서 서로에게 가족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이들을 쫒는 형사들은 그들의 감정을 이해해 나간다. 덕분에 소영과 동수, 해진은 자신의 감정을 서로에게 드러낼 수 있었고, 상현은 이들을 위해 깡패를 죽였으며, 수진은 남겨진 아이를 맡았다. 타인들 앞에서는 할 수 없지만 가족들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과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우리랑 이제 행복해지자꾸나" 이 대사는 가족의 정체성을 의미한다. 함께 모여서 행복해질 수 있는 집단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집단은 가족일 것이다. 즉, <브로커>는 일반적인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회의 소수자들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면 피가 이어지지 않아도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부성애를 중심으로 진정한 가족의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인데, 비슷한 시점으로 <브로커>를 분석한다면 <브로커>는 모성애를 중심으로 진정한 의미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중의 남성 등장인물들의 대부분은 어머니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다는 것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상현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언급이 나오고, 동수와 해진은 고아원에서 자랐다. 즉, 이들은 어머니로부터 그다지 사랑받아보지 못한 사람이거나 아예 사랑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성이라는 아들을 낳은 '어머니' 소영 역시 모성애를 느껴보지 못한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직접 '어머니'가 되어 모성애란 무엇인지에 대해 느끼게 된다. 그렇게 '어머니' 소영은 불을 끈 뒤 모두를 향해 "태어나줘서 고마워"라고 읊조린다. 이는 마치 출산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불이 꺼진 어두운 방은 어머니의 뱃속을 의미하며, 태어나줘서 고맙다는 대사 이후 불이 켜지면 상현과 동수, 해진은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피가 이어지지 않은 브로커 일당은 가족으로 거듭나게 되고, 모든 여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형사 일행 역시 브로커 가족의 모습에 이끌리며 모두는 하나가 된다.

 

한국과 일본의 정서적 차이

앞에서는 정서적 차이라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사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정서적 차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의외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순수 배경적인 면에서는 한국의 정서를 잘 표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내가 한국어와 일본어의 정서적 차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는, 일본어였다면 괜찮았을 각본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정서적인 괴리감이 생겨버렸고, 이것이 그대로 배우들에 의해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들어주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결국 한국어로 구사되면 어색해져 버리는 지점이 존재한다. 특히 초반에 송강호 씨가 구사하는 "우성아, 우리랑 이제 행복해지자꾸나" 같은 대사나, 강동원 씨가 자주 구사하는 "녀석" 같은 대사가 어색했다. 자, 그럼 여기서 이 대사들이 일본어로 구사되었다면 어떨까?

 

고레에다 감독은 당연히 일본어로 각본을 썼겠지만, 사실 나는 그 일본어 각본이 어떻게 쓰여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사실 여기부터는 나의 추측임을 감안해주시기 바란다. 먼저 "우리랑 이제 행복해지자꾸나"를 일본어로 바꾸어보자. 이 대사를 일본어로 바꾼다면 "私達一緒に幸せになろう(와타시타치토 잇쇼니 시아와세니나로오)"가 될 것이다. 이어서 "녀석"을 일본어로 바꾸어보면, "あいつ(아이츠)"가 될 것이다. 내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는 편이기에 조금 편향된 생각일 수는 있지만, 솔직히 일본 작품에서 꽤나 들어볼 법한 대사 아닌가? 즉, 이 각본이 일본어로 구사되었다면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 각본은 한국어로 구사되었다. 따라서 각본은 한국의 정서에 맞게 번역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다.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단연 각본, 연기, 촬영이다. 이 중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잘못되는 순간, 영화 전체가 잘못되고 만다. <브로커>에서는 각본이 잘못되었다. 그 결과 연기마저 함께 잘못되고 말았고, 이는 영화의 완성도를 크게 저하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상상해보시라. 잘못 번역된 각본을 읽은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아, 나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실제로 이 영화에는 강동원 씨나 배두나 씨 같이 이름 있는 쟁쟁한 배우들이 캐스팅되었지만, 나는 그들이 펼치는 연기가 정말 대단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각본에 적힌 대사마저 완벽히 소화하며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한 분 있었는데, 바로 송강호 씨다. 총평 파트에서 더 이야기할 예정이지만, 대단했다는 말은 미리 해두고 싶다. 송강호 씨의 연기는 기대해도 좋다.

 

달라진 고레에다 히로카즈

<브로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크게 달라졌다. 과거의 고레에다 감독은 자신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화면의 구성이나 분위기를 통해 잔잔하면서도 따뜻하게, 혹은 서늘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감독의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걸어도 걸어도>에서 조부모가 손자를 대하는 방식, <아무도 모른다>의 엔딩 장면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브로커>에는 노골적일 정도로 감독의 메시지가 직접 드러나 있다. 작중에서 소영이 모두를 향해 읊조리는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대사가 이를 증명한다. 이를 트집 잡고 싶은 것은 아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본래의 방식을 접어두면서까지 강렬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인간은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라면, 나는 이를 존중하고 싶다.

 

별로였던 것은 이러한 주제의 전달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 아닌,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는 것이었다. 바로 소영이 죽인 남자의 아내는 우성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다. 남자의 아내(이하 사모님)는 깡패를 시켜 우성이를 데려오려 한다. 우성이는 남편의 아들이니 자신이 키우겠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반드시 그녀가 우성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도는 묘사했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이 생각은 마지막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마지막 상현의 결심마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영화의 막바지에서 상현은 나머지 일당들을 지키기 위해 우성이를 데려가려는 깡패를 죽인다. 개인적으로 이 파트는 가족의 충돌로 묘사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당들을 지키려는 상현과 깡패를 통해 대변된 우성에 대한 사모님의 생각이 충돌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살해 파트는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 만다. 그저 상현이 가족과도 같은 일당들을 지키기 위해 깡패를 죽였다 정도로 묘사될 뿐이다. 이는 가족의 충돌이라는 갈등이 시작되지도 않은 채 끝나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주제에 공감했음에도 이 영화를 그다지 호평할 수 없을 것 같다. 언제나 치밀한 묘사를 보여주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감독이 영화의 중요한 파트를 책임질지도 모르는 인물의 묘사에 공백을 내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상현의 살해를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주제적, 각본적으로 그래야만 했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인지했기 때문이다. 즉, 인간과 가족애라는 작품의 주제와 일당을 지키기 위해 상현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이야기의 진행이 머릿속에 들어왔기에 기계적으로 이해된 것에 가깝다. 

 

총평

인간은 태어난 것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이 영화의 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브로커>는 이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완전한 가족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지만, 태어났기에 가치 있는 인물들이라는 연출이 작품 곳곳에서 계속 등장하고 있다. 영화는 꽤 볼만했다. 버려진 아기를 중심으로 물리적, 감정적으로 함께하게 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분명 감동을 주었다. 그럼에도 별로였던 것이라면 소영이 죽인 남자의 아내가 아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되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 결과 여정의 힘은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별로인 것은 대사. 감독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대사는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번역되었을 것인데, 정말 엉터리다. 한국 정서에 맞지 않는 일본 정서적 표현들이 번안되지 않았다. 

 

그 결과 배우들이 아무리 열연해도 별로인 장면들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송강호 씨의 연기는 정말 엄청났다. 그 별로인 대사들마저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모습은 그가 이제 어떠한 경지에 올랐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은 영화제 짬이 차서 받은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이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받을만했다고 본다. 송강호 씨 이외에 인상 깊었던 배우는 강동원 씨였고, 배두나 씨의 연기는 평범했으며, 아이유 씨의 연기는 TV 드라마에서 보여준 것과 비슷했다. 솔직히 대사 탓이 큰 것 같다. 이 영화가 괜찮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다만 <아무도 모른다>나 <어느 가족> 같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명작들에 비견할 정도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감독의 또 다른 한국어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좋겠지만, 솔직히 일본어 영화가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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