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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

나가레보시 2022. 5. 28. 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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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상상

(영상으로 시청 가능 https://youtu.be/7g_PlyDeNfs)

현재 일본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후로(난 고레에다 감독을 딱히 좋아하지 않지만) 가장 주목받는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하마구치 류스케일 것이다. 그는 <아사코>로 칸 영화제에 진출한 후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전에 리뷰한 적도 있는데, 정말 좋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작년 최고의 영화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이처럼 초특급 유망주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을 리뷰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 역시 정말 좋은 작품이다. 취향으로만 따지자면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도 좋은 작품이었고, 다른 작품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고평가 받을만한 작품이며, 결정적으로 옴니버스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마저도 단숨에 사로잡았을 정도로 매력적인 영화이다.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우연과 상상>은 세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따라서 각 단편의 줄거리를 살짝만 요약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제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여주인공 메이코는 우연히 친구인 츠구미가 자신의 전 남자 친구인 카즈키와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메이코는 곧바로 카즈키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의 내면 속 진실된 마음과 마주한다. 자신은 여전히 카즈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카즈키가 은연중에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로부터 3일 후, 메이코와 츠구미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창문 밖에서 지나가던 카즈키와 마주치게 되고, 츠구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카즈키를 카페 안으로 불러들인다. 그렇게 우연으로 인해 메이코의 상상이 시작된다.

상상 속에서 메이코는 츠구미에게 폭탄선언을 한다. 그녀는 카즈키의 전 여자 친구는 자신이었고, 자신은 아직도 카즈키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부 말한다. 츠구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고, 카즈키도 츠구미를 따라간다. 카메라는 홀로 남은 메이코의 모습을 줌 인하고, 다시 줌 아웃한다. 그렇게 메이코는 상상 속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의 메이코는 상상 속에서처럼 파문을 일으킬 수 없다. 그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찻값 계산을 부탁하며 두 사람의 앞날이 잘 풀리기를 바라 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코는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상을 통해 깨닫게 된다. 상상 속에서처럼 행동하면 인간관계가 파탄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메이코는 카페를 나와 지나온 길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꽃이 피어있다. 그녀의 앞날을 위로하듯이.

문은 열어둔 채로
제2화 <문은 열어둔 채로>는 50대에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대학 교수 세가와로부터 낙제당한 남학생 사사키가 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내연녀 나오를 교수실로 불러들이며 생기는 일을 다룬다. 나오가 세가와 교수를 만나게 되는 계기는 인공적이다. 사사키의 부탁으로 세가와 교수를 파멸시키기 위해 교수실에 잠입한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공적인 만남은 서서히 자연스러워진다. 세가와 교수는 자신의 소설을 낭독하는 나오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되고, 나오에게 낭독 녹음본을 메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나오는 세가와 교수의 조언으로 자신의 계획을 사과하며 자기 자신의 마음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음모로 시작된 만남은 서로가 서로의 내면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만남으로 변화하게 된다. 그 후, 우연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집에 돌아온 나오는 세가와 교수에게 녹음본을 보내기 위한 메일을 쓴다. 그러던 중 남편과 아이가 '사가와'라는 말을 흥얼거리며 귀가하고, 나오는 메일 주소를 segawa가 아닌 sagawa로 입력하고 만다. 우연히도 사가와는 나오가 다니는 대학의 관계자였고, 그렇게 나오와 세가와의 삶은 파탄나고 만다. 나오는 이혼을 당했고, 세가와는 해고되었다. 5년 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나오와 사사키는 우연히 재회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세가와 사건을 화제에 올리게 되고, 동시에 파탄의 원인 제공자였던 사사키는 곧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부터 상상이 시작된다. 정확히는 우리가 해야 하는 상상이다. 나오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세가와 교수와의 대화 이후, 그녀는 바뀌었다. 나오는 자신을 파탄 낸 예비 유부남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제3화 <다시 한번>은 Xeron이라고 불리는 바이러스로 인해 정보 사회가 붕괴하여 디지털에서 아날로그로 회귀한 세상을 배경으로 두 여인의 만남을 그린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동창회 초대 편지를 받고 센다이로 향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만난 동창들과 대화하며, 단골이었던 식당의 주인 아저씨와 대화하며 과거의 기억은 의외로 빠르게 잊혀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렇게 역으로 돌아가던 주인공은 우연히 과거의 동창과 마주치게 되고, 그녀의 집으로 초대받게 된다. 문패에는 코바야시라는 성이 쓰여 있다. 일본은 부부 동성을 채택하고 있고, 아내가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보편적이므로 주인공은 자신의 친구도 결혼하여 성이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랜 해후를 풀던 중, 친구는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게 된다. 자신은 주인공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묻는다. "너는 내 이름을 알고 있어?" 주인공은 당연하다는 듯 유키 미카의 이름을 외친다. 하지만 상대의 이름은 코바야시 아야였다. 진상은 이러하다. 사실 주인공은 역에서 코바야시 아야를 유키 미카로 착각했고, 코바야시 아야는 그런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동창인가 싶어서 그대로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었다.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돌아가려 하지만, 코바야시 아야는 그녀를 붙잡아 더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이 말한다. 미카는 자신의 첫사랑, 여자 친구였으며 잠깐 헤어진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고. 그러자 코바야시 아야는 자신이 미카를 연기해보겠다고 제안하며 주인공의 이름을 묻고, 히구치 나츠코라는 답을 듣는다. 곧바로 코바야시 아야는 미카를 상상한다. 히구치 나츠코는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다.

그렇게 대화하던 두 사람은 아들이 귀가하자 그만 헤어지기로 하고, 코바야시 아야는 히구치 나츠코를 역까지 바래다주기로 한다. 역으로 가는 길에서, 히구치 나츠코는 코바야시 아야에게 자신과 헷갈렸던 동창이 누구나고 묻고, 코바야시 아야는 점심시간에 피아노를 같이 쳤던 친구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히구치 나츠코가 제안한다. 자신이 그 친구를 연기해보겠다고. 곧바로 히구치 나츠코는 점심시간에 피아노를 같이 쳤던 친구를 상상한다. 코바야시 아야는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친구에게 전하며 자신의 마음과 마주한다. 상상이 끝난 후,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긴 채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그때, 코바야시 아야는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다시 역으로 되돌아가 히구치 나츠코를 향해 잃어버린 이름을 외친다. "노조미!" 두 사람은 껴안는다. 서로의 바람(일본어로 노조미)을 담아서.

우연과 상상
어떠셨는가? 세 단편이 각각 확고한 맛을 갖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세 단편들은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로 묶여 있다는 인상도 든다. 그렇다면 이 단편들을 하나로 묶는 요소는 대체 무엇일까? 아마 눈치채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앞에서 의도적으로 이 요소를 강조해 언급했다.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우연과 상상이다. 세 단편들의 이야기는 전부 우연에 의해 시작되고, 전개된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고 이야기를 완결시키는 것이 상상이다. 동시에 우연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관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고, 상상은 그 작품관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우연과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작품관과 이를 표현하는 도구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 있다. "<열정> 이후 10년 간의 내 작업을 요약하면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에 있어 우연은 중요하다. 촬영에 있어서도, 연기에 있어서도 하마구치 감독은 우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러한 촬영의 우연과 연기의 우연 중 오늘 우리가 더 자세히 알아볼 것은 연기의 우연에 대해서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하마구치 감독의 연기론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하마구치 감독은 대본 리딩을 할 때 배우에게 아무 감정 없이 대본을 읽고, 외우게 한다. 그리고 촬영에 들어갈 때, 배우에게 그 자리에서 받은 느낌과 감정에 즉각 반영해달라고 주문한다. 오로지 외운 대사와 현장에서 벌어지는 우연에 의해 연기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렇게 인조적인 감정이 아닌, 자연스러운 감정을 연출해낸다.

이 모습,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이러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연기론은 그의 영화인 <드라이브 마이 카>에 매우 자세하게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소재인 연극은 모두 하마구치 감독의 연기론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 아무 감정 없이 대본을 읽고 외우는 장면과, 배우의 느낌과 현장의 우연에 의해 멋진 연기를 펼치는 장면 역시 등장한다. 이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연기론의 적용법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우연과 상상>에서는 어떨까? 나는 이 영화에서 하마구치 연기론의 의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상상이라는 요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세 단편의 인물들은 모두 상상을 통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끈다. 여기서 상상은 우연의 세계를 돌파해나가는, 나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상상이 우연에 개입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연 역시 상상에 개입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관에 관한 우연이 아닌, 연기에 관한 우연이 상상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 단편 속 주인공들의 상상은 전적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 단편 속의 상상은 곧 하마구치 연기론에 입각하여 이루어지고 있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하마구치 연기론의 의의를 알 수 있다. 나 자신과 마주하여 갈등을 풀어나간다는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전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적인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해내는 수단, 그것이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 연기론의 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럼 다시 상상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서 우연과 상상은 대비되어 있다.

우연은 불가항력적이다. 메이코는 우연히 츠구미와 카즈키의 관계를 알게 되고, 나오는 우연히 교수와 관계를 맺게 되며, 히구치 나츠코와 코바야시 아야는 우연히 역에서 마주친다. 이러한 우연은 피할 수도, 저항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관념이다. 상상은 이와 반대된다. 상상은 주체적인 관념이다. 우연이라는 불가항력적 세계를 돌파하여 나 자신과 마주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상상이라는 관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가항력과 주체의 관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이 관계 역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인 <아사코>에 등장한다. 작중에서 주인공 아사코의 만남은 모두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 바쿠와 료헤이와의 만남도, 바쿠와의 재회도 전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이는 곧 아사코의 주체성이 상실되어있음을 의미한다. 아사코는 불가항력에 의해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사코는 결국 주체성을 회복한다. 그녀는 방파제 너머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재앙의 끔찍함과 그러한 재앙이 초래한 것, 자신의 행동이 초래한 것, 료헤이와 함께 이루어야 할 것을 떠올린다. 즉, 상상한다. 이후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돌아간다. 상상은 비단 아사코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엔딩에서 료헤이와 함께 불어난 강을 바라보며 더러운 강이라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아사코의 모습과, 그런 아사코를 바라보는 료헤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료헤이가 우연에 의해 떠나갔던 아사코라는 재앙의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 무언가를 상상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영화 <아사코>는 이처럼 우연이라는 불가항력적 재앙의 기억을 주체적인 상상을 통해 극복해나가는 작품이다.

<우연과 상상>도 비슷하다. 재앙까지는 아니지만, 이 영화도 <아사코>처럼 우연에 의한 불가항력적 내적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주체적인 상상을 통해 극복해나가는 모습이 반복된다. 메이코는 츠구미로부터 카즈키를 빼앗는 상상을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고, 자신을 파탄 낸 예비 유부남 사사키를 유혹하는 나오의 모습에서 우리는 유쾌한 상상을 할 수 있으며, 히구치 나츠코와 코바야시 아야는 상상을 통해 아련한 첫사랑의 슬픔과 잃어버렸던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상상의 모습은 <우연과 상상>이 <아사코>보다 강렬하다. <아사코>에서 상상은 우연보다 뒤쳐진 채 재앙의 기억을 극복한다는 주제를 표현하는 수단에 그치지만, <우연과 상상>에서 상상은 주제의 표현 수단을 넘어 로맨스나 코미디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관객들을 조종하는 수준에 이른다.

그래서 내가 취향으로만 따지면 <우연과 상상>이 그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좋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를 대표하는 관념인 우연은 그의 어떤 작품들보다 강렬하고 아름답게 나타나 있으며, 그 우연을 뒷받침하면서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상상은 장르를 넘나들며 영화와 관객을 조종하는 수준에 달했으니 말이다. <우연과 상상>은 세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이다. 만약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이 옴니버스를 뛰어넘어 장편 영화에서도 이러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다면, 그는 일본 영화의 새로운 거장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단언컨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의 신작이 빨리 나오기를 기대하고 기다릴 뿐이다.

홍상수
앞에서 이렇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사실 <우연과 상상>은 이러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색채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색채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단 한 편이라도 보신 분들이라면 바로 알아챌 수 있을만큼 강렬하다. 홍상수 특유의 줌 인, 줌 아웃 방식과 롱 테이크 대화 장면 등이 그 예시이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은 홍상수 감독의 색채가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만의 색채로 재탄생 되어 있는 영화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줌 인, 줌 아웃 방식에서 드러나는 홍상수 감독 특유의 색채가 어떻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만의 색채로 재탄생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지는 않았다. <옥희의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강변호텔> 이렇게 세 작품을 보았다. 하지만 이 작품들만으로도 홍상수 감독이 어떤 촬영법을 구사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홍상수 감독의 촬영법은 단순하면서도 그만의 색채가 듬뿍 담겨 있는 촬영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홍상수 감독의 촬영법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단연 줌 인, 줌아웃 방식일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팬들이 '상수줌'이라고 부를만큼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글로 표현하기는 좀 어려운데, 우리가 휴대폰 카메라로 줌을 당기고 풀 때를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사실 이 말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방법은 그냥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하나를 골라잡고 감상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연과 상상>을 보면 이러한 홍상수 감독의 줌 인, 줌 아웃 방식이 그대로 나타난다. 메이코의 상상이 끝나는 장면, 나오가 segawa를 sagawa로 잘못 작성하는 장면, 히구치 나츠코와 코바야시 아야가 대화하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방식이 등장한다. 사실 나는 이러한 줌 인, 줌 아웃 방식의 등장이 웃겼다. 홍상수 감독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솔직히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쓰인 줌 인, 줌 아웃 방식은 모습만 홍상수 감독의 그것과 비슷할 뿐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홍상수 감독은 줌 인, 줌 아웃을 편집의 대용으로 사용한다. 영화의 흐름을 컷 편집으로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지 않으니, 그 대신에 과감한 줌 인, 줌 아웃으로 컷 편집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그렇지 않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러한 줌 인, 줌 아웃을 우연과 상상이라는 관념을 포착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당장 앞에서 들었던 예시를 떠올려보시라. 메이코를 줌 인, 줌 아웃하는 장면은 메이코가 '상상'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또한 나오가 segawa를 sagawa로 잘못 작성하는 장면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며, 히구치 나츠코와 코바야시 아야가 대화하는 장면들은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들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전부 줌 인, 줌 아웃으로 '포착'된다. 이러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모습에서 나는 깨달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진가는 그만의 독창적인 연출법보다는 검증된 연출법들을 자신만의 연출법으로 재탄생시키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고 하마구치 감독만의 독창적인 연출법이 타 감독들에 비해 꿇리는 것도 아니다.

총평
이 영화는 뭐랄까, 우연이라는 무대에서 상상이라는 연기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각인시키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과정은 정말 좋았다. 연출적인 면은 좀 웃겼다. 홍상수 감독의 색채가 분명하게 나면서도(롱 테이크 대화 장면이라거나, 줌 당기는 장면이라거나) 이를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본인의 색채로 바꾸어내는 것이 대단하면서도 웃겼던 것 같다. 난 옴니버스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의 단편에 행복하게 푹 빠져있다가 다른 단편으로 넘어가는 순간 그 행복감이 사라지면서 영화에 대한 집중을 깨뜨려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은 달랐다. 우연과 상상의 세계가 이리저리 바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웠고, 웃겼고, 흐뭇했다. 우연히 피어난 상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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