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으로도 시청 가능 https://youtu.be/FWVmDi1tFBw)
지난 리뷰에서 나는 로봇 애니메이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2021년, 그런 나의 취향을 완벽하게 깨부순 작품이 등장했다. 아메미야 아키라 감독의 <SSSS.DYNAZENON>이라는 작품이었다. 나는 <SSSS.DYNAZENON>을 리뷰하면서 취향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로봇 전투 장면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이유를 전투 장면에도 드라마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전투를 통해 나타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내용 전개에 이용하면서 흥미진진한 장면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SSSS.DYNAZENON>은 나의 인생 애니메이션으로 남았다. 하지만 사실 2021년에 이와 비슷한 방법을 통해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이시이 토시마사 감독의 <86 -에이티식스->가 바로 그것이다.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는 레기온이라는 인공지능 살상 병기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군인들이 인종차별 정책의 일환으로 징집된 소년병들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평범한 로봇 애니메이션들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인종차별이 만연한 세계관인만큼, 작중의 지배 인종인 백계종들은 피지배 인종인 에이티식스를 인간으로도 대우하지 않는다. 그나마 주인공인 블라디레나 밀리제(이하 레나) 같은 소수의 백계종들만이 에이티식스들의 인권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TV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는 이러한 최악의 상황에서 주인공 레나와 신이 각각 자신의 위선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마음을 키워가고, 끝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채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내용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위선과 죄책감
여주인공 레나는 조국의 인종차별 정책을 혐오했던 아버지 바츨라프 밀리제와 레기온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에이티식스 쇼레이 노우젠의 영향으로 인간이라면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올바른 사상을 갖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러한 사상을 토대로 자신이 처음으로 지휘를 맡게 된 부대인 스피어헤드 전대의 대원들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레나는 한 부대원의 전사를 계기로 세오로부터 자신이 부대에서 기르는 고양이의 이름은 물어보았음에도 부대원들의 이름은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지적당하게 된다. 인간 평등사상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고 있던 그녀였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에이티식스들을 차별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레나는 반성과 함께 부대원들에게 더욱 다가가고자 한다.
남주인공 신은 형 쇼레이 노우젠의 망령이 깃든 레기온을 찾아 형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신은 뛰어난 조종 실력과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활용하여 살아남아왔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신은 살아남을 가망이 없는 동료들이 레기온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도록 마무리해주는 역할을 맡게 되고, 언더테이커(장의사)라는 코드네임으로 불리게 된다. 신은 이러한 사신(死神)의 역할에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떠나보낸 동료들의 자신을 원망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스피어헤드 전대는 에이티식스들을 처리하려는 윗선에 의해 어떠한 지원도 없이 사지로 내몰리게 되지만, 신은 형의 성불을 이룬 후 레나에게 뒷일을 맡긴 상태였기 때문에 미련 없이 떠나고자 한다.
여기까지가 <86 -에이티식스-> 1쿨 분량의 내용이다. 요약해보면 레나의 시점에서는 지금까지 품고 살아온 자신의 사상이 위선이었음을 깨닫고 이를 반성해나가는 내용이고, 신의 시점에서는 형을 성불시키고 삶의 목표를 잃은 공허한 상태에서 서로의 어두운 면을 공유하며 마음을 나누었던 동료 레나에게 뒷일을 맡긴 후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자 하는 내용이다. 즉, 이 작품의 1쿨은 레나에게는 성장의 이야기이지만 신에게는 자신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후 전개될 2쿨에서는 레나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여 신에게 당도했는지, 신이 어떻게 공허함에서 빠져나와 죄책감을 딛고 레나와 함께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어야 한다. 물론 <86 -에이티식스-> 2쿨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다.
신념과 희망
윗선에 의해 사지로 내몰리게 된 스피어헤드 전대는 기적적으로 구출되어 기아데 연방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를 통해 부대원들에게는 평범한 삶을 살아갈 기회가 주어지게 되지만, 신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먼저 전사한 부대원들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인해 모두 전장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신은 삶의 의미와 소중한 가족, 부대원들을 전부 잃었으며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던 레나마저 생존이 불확실한 상태이게 때문에 사실상 자살을 생각한 채 장교로 임관하여 위험한 임무들을 도맡게 된다. 그러던 중 레기온의 대공세가 시작되고, 신과 대원들은 목숨을 걸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선다. 하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전투였기에 대원들은 조금씩 진영을 이탈하게 되고, 신은 홀로 키리야 노우젠의 망령이 깃든 열차포 앞에 당도한다.
신은 처절한 싸움 끝에 프레데리카와 산마그놀리아 공화국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모든 동료들은 전사하여 자신의 곁을 떠나갔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 신은 키리야 노우젠의 마지막 일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지만, 그 앞에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레나가 나타나 신을 구하게 된다. 이에 신은 또다시 살아남게 된 자신을 자조하며 레나와 그녀가 이끄는 에이티식스 부대를 조롱하지만, 레나는 이에 스피어헤드 전대를 위시한 에이티식스들에게 이어받은 의지와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그들이 죽었든 살았든 그들을 따라잡아 함께 싸우고 싶다고 반박한다. 동시에 부대원들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신을 맞이하게 되면서, 신은 자신을 뒤쫒아온 레나에게 전장의 풍경을 보여줄 수 없다며 의지를 다잡게 되고, 그렇게 신의 죄책감은 희망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86 -에이티식스->의 2쿨은 위선적이었던 레나의 사상이 신념으로 거듭나 삶의 의미를 잃은 채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에만 빠져 있었던 신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구원하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희망이라는 이름의 한줄기 빛이 존재하는 한 어두웠던 과거를 딛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86 -에이티식스->의 배경은 역겨운 인종차별이 만연하고 언제 목숨을 잃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전장이지만, 주인공 레나와 신의 이야기에 내포되어 있는 희망적인 메시지는 어둡기만 한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삶의 의지를 꺾는 수많은 절망보다도 그 앞에 있을 한 줄기의 희망을 보고 살아가야 한다.
총평
박해 집단의 이단아 소녀와 피박해 집단의 이단아 소년이 있다. 소녀는 박해를 혐오하기에 최악의 상황에서도 피박해 집단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위선일지 모른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을 존중하는 나 자신에 취해 거꾸로 무시하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소년은 낙오된 동료를 편히 보내주는 사신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동료들이 적에게 이용당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동료들의 죽음은 죄책감이라는 잔상으로 남아 소년의 모든 것을 속박한다. 그렇기에 소년은 싸워야 한다. 그렇게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야 한다. 그런 소녀와 소년이 만난다. 서로 마주 볼 수는 없지만, 각자의 위선과 죄책감을 공유하며 마음을 키워간다. 소녀는 약속한다. 잊지 않겠다고, 뒤따라 가겠다고. 소년은 소녀를 기다리며 싸운다. 그렇게 위선은 신념이 되었고, 죄책감은 희망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다.
애니메이션 <86 -에이티식스->는 대단한 작품이다. 1쿨은 놀라움의 연속이었고, 2쿨은 이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정말 좋았다. 감독이 신인인 탓에 스케줄 관리에 실패하여 2021년에 시작한 작품이 방영 연기로 2022년에 끝나버렸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뛰어난 신인 감독들이 늘어나고 있다. 각각 <원더 에그 프라이어리티>로 데뷔한 와카바야시 신 감독과 <86 -에이티식스->로 데뷔한 이시이 토시마사 감독이 그 예시다. 이들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또 다른 괴물 신인들이 나타날 것인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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