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중'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자중은 외부에서의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신중히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일본 문화권에서 자중은 외부에서의 자신의 행동이 고스란히 자신의 해로 돌아오는 일이 있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신중히 하는 행위이다.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일본인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없도록 자중하며 살아간다.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이 이 불만을 "아, 이 세상이 사라진다면 자중할 필요는 없을 텐데."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난 이 대목에서 폭소했다. 많은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서 등장하는 자의식 강한 인물의 단골 대사는 "이 세상 같은 건 망해버리면 좋을 텐데."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랜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저런 대사를 자의식 강한 인물들이 주로 구사하는 이유는 인물의 성격상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이 생겨 자중하게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었군!'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인만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분석, 고찰하여 설명한다. 이 고찰은 일본의 이웃에 있는 한국의 사람인 나에게는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충, 효, 의리 등 한자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들을 설명하는 대목들에서는 '한국도 비슷하지.' 하며 일종의 반가움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이 개념들이 일본화되어 독자적인 정신문화로 발전했음을 설명하는 대목들에서는 '이것이 내가 알고 있던 개념들이 맞나?' 하는 기시감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루스 베네딕트의 글은 깨달음과 재미를 동시에 선사한다. 특히 무아(無我)에 대한 설명이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무아란 무아지경(無我之境)의 무아로, 어떠한 것에 몰두했을 때 쓰는 말이다. 베네딕트는 이 무아가 일본인들이 잠시나마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무아를 통해 이 세상에 자기 자신만을 남기면서 자기 감시와 이를 원하는 사회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무아의 해석과는 달랐다. 나는 무아를 '속세에서 벗어나 몰두를 통해 본모습을 찾을 수 있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네딕트는 무아를 '자기 감시를 통해 자신을 집단에 맞추어야 하는 사회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회적 해석을 내놓았다. 내게 이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인 것이 사회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을 보았을 때의 충격과도 같다.
일본 여성에 대한 설명에는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이 재미는 조금 한심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베네딕트는 일본 여성이 어렸을 적에는 성에 대해 조신하길 원하는 풍토에 맞추어 살지만, 아이를 낳고 점점 나이 들어갈수록 남편과의 자리나 왁자지껄한 모임 등에서 성적인 농담 등으로 흥을 돋우곤 한다고 설명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다시 한번 폭소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소설 등에서 30 중후반대의 아내가 부부동반 모임 중 남편을 향해 성적인 농담을 하고, 이에 남편은 당황하며, 주변인들은 흐뭇하게 박장대소하는 장면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의 정신문화는 일본의 사회, 대중문화 등 일본의 모든 것에 깊이 뿌리 내려 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은 이러한 일본의 정신문화를 날카롭게 통찰한 위대한 저작임이 틀림없다. 결정적으로 일본인의 정신문화에 깃들어 있는 양면성을 체계적으로 통찰하고 분석한 첫 번째 책이라는 점에서 영원불멸의 일본학 고전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다.
<국화와 칼>은 1946년, 쇼와 시대에 출판됐다. 하지만 현재의 일본인들은 쇼와 시대와 헤이세이 시대를 거쳐 레이와 시대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일본인들의 정신문화도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 역시 결국에는 과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는 이 책이 여전히 가치 있고 앞으로도 가치 있을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룩 백: 교토 애니메이션을 추모하며 (2) | 2024.07.13 |
---|---|
나는 떡볶이가 싫다 (0) | 2022.04.11 |
소녀종말여행 (0) | 2022.01.24 |
인간 실격 (0) | 2021.08.18 |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0) | 2021.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