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터널스

나가레보시 2021. 11. 8.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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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스(2021)

(영상으로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aCVvP28ghEE)
20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의 영화 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시리즈를 꼽으라면 단연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약칭 MCU) 일 것이다. 이러한 MCU가 2019년에 개봉한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통해 '인피니티 사가'라고 명명된 첫 번째 대장정을 끝마쳤다. 이에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을 것이고, 마블의 새로운 도약에 기대감을 가질 팬들도 있을 것이다. 엔드게임 이후 마블은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부터 <블랙 위도우>,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까지 세 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스파이더맨은 엔드게임의 뒤풀이, 블랙 위도우는 캐릭터에 대한 헌정 영화이니 제외해보면 샹치와 이번에 개봉한 <이터널스>가 실질적인 마블의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이터널스>는 마블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세계관을 이끌어갈지 암시하고 있는 영화다. 물론 세계관을 제외하고 보아도 <노매드랜드>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클로이 자오 감독의 영화답게 개별적으로도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인간 찬가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내면 속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찬양하는 인간 찬가적인 작품이다. 셀레스티얼에 의해 지구로 파견되어 인간들의 문명에 큰 영향을 미쳐온 '이터널스'는 지구라는 행성과 그곳에 살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족들에게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 예시로 능력을 이용해 인간들의 기술 발전에 도움을 준 이터널 '파스토스'는 자신이 촉진시킨 기술 발전이 히로시마 원폭으로 인한 대량 살상이라는 결과로 나타나자 인간에 대한 희망을 접지만, 그럼에도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며 인간들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또한 '드루이그'는 인간들의 분쟁을 보고 실망하면서도 끝내 그들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는다. 그 외의 이터널들도 '세르시'처럼 인간 연인을 만나거나 '킨고'처럼 인간 집사를 두기도 하며 인간 그 자체에 대해 호감을 쌓아가고, 인간처럼 살아간다.

이러한 인간 찬가적 메시지는 이터널스의 진정한 목적인 '이머전스'의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극대화된다. 이터널스는 자신들의 존재가 지구에 지적 생명체인 인간들의 수를 늘리고, 이들을 지구에서 태어날 새로운 셀레스티얼 티아무트의 자양분으로 바치는 것임을 알게 되자 서로 갈려 갈등하기 시작한다. 세르시나 파스토스처럼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지구와 인간들을 셀레스티얼의 자양분으로 희생시키고 이에 대한 기억도 잃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머전스를 막으려 하는 분파도 있고, '이카리스'처럼 셀레스티얼에 충성하는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고 이머전스의 실행을 위해 동료들과 대립하는 분파도 있다. 물론 이렇게만 나뉘지는 않고, 자신의 감정에 따라 이카리스를 따르는 '스프라이트'나 이카리스에 대한 충성과 인간에 대한 애정 속에서 갈등하며 최종전에 불참하는 '킨고' 같은 캐릭터들도 있다.

이는 거꾸로 로봇처럼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이터널스가 갈등을 반복하며 발전해 온 인간들처럼 변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은 갈등 이전에도 인간과 유사한 모습들을 보여왔다. 세르시로 대표되는 타인과의 사랑이나 '길가메시'와 '테나'의 사랑에 의한 보호 관계 등이 그 예시다. 그 외에도 길가메시가 죽었을 때 그를 떠나보내며 합장을 하는 모습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망자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생명체 외에는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터널스가 오랜 시간 동안 인간들과 지내며 '인간화' 되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인간화되어가는 이터널스는 끝내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해서까지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리는 셀레스티얼에 의해 탄생한 로봇 같은 존재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머전스의 앞에서 우리는 이를 실행해야 하는가, 막아야 하는가?'라는 의문까지 제기하기 시작한다. 즉, 이터널스는 서서히 인간화하며 자기 자신들을 탐구한 끝에 프로그래밍된 개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프로그램까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서 이터널스가 자신들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한 원인이 타노스를 물리치고 우주를 구한 어벤져스, 즉 인간들에 의한 것임이 인상적인 포인트다.

이러한 의심 끝에 여러 분파로 갈린 이터널스는 싸움을 시작한다. 세르시, 테나, 파스토스, 마카리, 드루이그는 이머전스를 막고자 하고 이카리스와 그를 사랑하는 스프라이트는 이머전스를 실행시키고자 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셀레스티얼 티아무트의 탄생은 저지되고, 패배한 이카리스와 스프라이트는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셀레스티얼에 대한 충성과 세르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인간성의 갈등, 그리고 에이잭에 대한 죄의식 끝에 이카리스는 태양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서 이카리스의 사인이 인간과 같은 고지능 생명체들만이 시도하는 자살이라는 점이 인상 깊다.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채로 늙지 않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었던 스프라이트는 항상 '성장'에 대한 동경을 품고 있었고, 끝내 세르시의 힘으로 이터널을 포기하는 대신 인간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서 이카리스와 스프라이트 두 인물은 다른 선택을 했지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받아왔다는 것에서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이터널스는 새롭게 시작된다. 몇몇은 지구에 남아 세상을 지키는 영웅이 되고, 또 다른 몇몇은 우주 밖으로 나가 새로운 셀레스티얼의 탄생을 저지하는 영웅이 되며, 힘과 불멸을 버리고 완전한 인간이 되기도 한다. 마블의 새로운 주축이 될 이터널스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다양성
이 영화는 다양성의 측면에서도 꽤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에는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성소수자 캐릭터 파스토스와 청각장애인 캐릭터 마카리가 있다. 특히 마카리는 실제로 청각장애인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것에서 소소한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동아시아인, 흑인, 백인 등 다양한 인종들이 등장하고, 팀의 리더인 세르시는 여성 캐릭터로 등장하는 등 <이터널스>는 '다양성'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또 디즈니랑 마블이 '정치적 올바름'을 과도하게 의식한 것 아냐?' 이에 대해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디즈니는 정치적 올바름을 과도하게 의식하는 회사이고, 이로 인해 크게 지탄받는 회사이기도 하다. 실제로 명작 애니메이션 영화 <뮬란>의 실사 영화를 정치적 올바름 하나로 대차게 말아먹었고, <인어공주>의 실사 영화 캐스팅도 큰 논란이 되고 있으며,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의 평가를 깎아먹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 흥행을 위해 정치적 올바름을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위구르나 티베트에서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 중국에 설설 기기도 하는 등 내로남불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이러한 디즈니지만, <이터널스>의 다양성 강조는 꽤 훌륭한 편이다. 다른 디즈니 계열 영화들처럼 과도하게 인종이나 성별을 강조하지도 않고, 청각장애나 게이 같은 사회적 소수성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저 캐릭터들이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만 있을 뿐, 이것이 전면적으로 부각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인간성에 대해 고민하고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내게 정말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것이 케빈 파이기를 필두로 한 제작 관계자 덕분인지, 영화의 감독인 클로이 자오 덕분인지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지만, 제작 단계에서 잡혀있었을 다양성 설정을 영화 속에 구현한 것은 클로이 자오 감독일 것이므로 나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세계관과의 연결성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이를 넘어서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채택하고 있는 시리즈들은 필연적으로 각각의 영화들이 서로 연계되어 거대한 하나의 세계관을 이룬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터널스>에도 세계관과의 연결성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도 이 영화는 엔드게임 이후 파격적으로 변화할 MCU의 새로운 기반을 잘 닦아둔 작품이다. 셀레스티얼이라는 거대한 설정을 제대로 풀어냈고, 이터널스와 연계될 새로운 캐릭터들의 예고도 착실히 해내었으며, 앞으로 이터널스에게 벌어질 일들 또한 흥미진진하게 예고했기 때문이다. '인피니티 사가'를 완결 짓고 새로운 이야기를 쌓아나가야 할 마블에게 <이터널스>는 좋은 출발이 된 작품이다.

총평
<이터널스>는 세상과 물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정신적으로는 유리되어 있는 개체들이 어떻게 상대를 사랑하고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의 다양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자신들에 대해 고민하고 각각 해답을 찾는 과정은 정말 흥미롭다. 다양성에 대해서 이야기했듯 이 영화엔 성소수자, 청각장애인 등 다양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다양성을 영화 전반에 제대로 녹여낸 것도 칭찬할 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는 아쉬운 점이 몇 가지 존재한다. 10명에 가까운 캐릭터들의 서사를 풀어나가야 하는 것에서 벌어진 캐릭터들의 개별적 서사 분량의 부족과 이를 뒷받침해줄 설정의 부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이터널스>는 개별적으로도, 세계관적으로도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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