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안도 마사시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시리라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하야오, 콘 사토시, 신카이 마코토 같은 유명 감독들의 영화에서 작화감독을 담당한 애니메이터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파프리카>, <너의 이름은.> 같은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개인적으로 안도 마사시의 명성은, 작화라는 애니메이션의 근본이 어느 날 반대로 뒤집히지 않는 이상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안도 마사시의 감독 데뷔작 <사슴의 왕>이 한국에 공개되었다. 오래전부터 안도 마사시가 참여한 애니메이션들을 보아왔던 내가 이를 놓칠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감상한 안도 마사시와 미야지 마사유키, 두 감독의 영화 <사슴의 왕>은 작화만큼은 정말 뛰어난 작품이었다.
재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모든 운명들을 짊어지고 떠나며, 운명은 자신이 개척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이야기. 영화 <사슴의 왕>의 주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사실 이 주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노노케 히메>의 주제와 유사하다. <모노노케 히메>의 엔딩 장면을 보면, 산과 아시타카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고, 운명을 개척하며 살아가게 될 것임이 강하게 암시된다. 하지만 <모노노케 히메>는, 개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주제인 생태주의에 경도되어 그 암시를 퇴색시키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사슴의 왕>은 이 아쉬움을 보완해 낸 작품이었다. <모노노케 히메>의 대립 구도는 인간 대 자연이다. 산과 아시타카는 그 구도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 하지만, <사슴의 왕>은 그렇지 않다.
<사슴의 왕>의 대립 구도는 인간 대 운명이다. 그러한 구도에서 운명은 철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스스로 개척해야 하는 것으로 나뉜다. 전자는 전염병을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는 자들의 생각이고, 후자는 주인공 일행의 생각이다.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치 체념한 것처럼 보인다. 전염병이라는 저주를 다룰 수 있는 아카파가 침략자 츠오르를 몰아낸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운명에 갇혀 여러 번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주인공 일행은 저마다의 목표를 갖고 기존의 운명에 저항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한다. 주인공 '반'은 수양딸 '유나'를 구출해 살아가겠다는 목표를, '홋사르'는 의사로서 전염병을 종식시키겠다는 목표를 갖고 저주라는 운명에 거세게 저항한다. <사슴의 왕>은 그 저항을 그려내는 영화이다. 하지만, 그 저항은 인상 깊었던 만큼 피로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분명 두 사람의 저항은 인상 깊다.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모두를 위해, 저주와도 같은 기존의 운명을 모두 짊어지고 사슴의 왕이 되어 떠나가는 반의 모습도, 모두가 저주라고 부르며 다가가기 꺼려했던 진실에 접근하여 끝내 전염병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이끌어내는 홋사르의 모습도 모두 작품의 주제에 깊이를 더해준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는 끊임없이 관객을 괴롭히는 압박감이 존재한다. 그 원인은 각색에 있다.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사슴의 왕>의 원작 소설은 한국어 번역본 기준 상하권을 모두 합쳐 100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이야기를 두 시간으로 볼만하게 각색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결국 <사슴의 왕>의 이야기는 피로해졌다. 덕분에 영화에 제대로 집중하지 않으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각본이 빡빡해진 것.
<사슴의 왕>과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던 영화가 있다.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의 <해수의 아이>다. 다만, 와타나베 아유무 감독은 뛰어난 연출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 내었고, 안도 마사시 감독과 미야지 마사유키 감독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두 영화의 차이점이다. 따라서 <사슴의 왕>은 상당히 인상 깊은 주제를 표현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큰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었다. 하지만, 안도 마사시 감독은 자신의 주력 분야에서 기어코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작화. <사슴의 왕>의 작화는 정말 훌륭하다. 자연 속을 내달리는 동물들의 움직임과, 저마다의 운명을 걸고 맞서 싸우는 인물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특히 동물 작화에 있어서는 <모노노케 히메>의 그것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결국, 안도 마사시를 잃은 스튜디오 지브리는 크나큰 손실을 입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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